, 본 기사는 중앙일보 7월 9일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휴가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현실이 기대에 부응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니 말이다. 누구나 출발할 땐 부푼 가슴으로 떠난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면 상상했던 것과 달라 실망하기 일쑤다. ‘이럴 바엔 차라리 집에 있을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일하는 것도 힘든데 쉬기 위한 여행, 그것마저 참 어렵다.
미간에 내 천(川) 자가 깊게 파인 50대 후반 남성이 클리닉을 찾아왔다. 삶에 너무 지쳤단다. ‘영업용’ 골프도 싫고, 휴대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짜증이 난다고 했다. 혼자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데 몸이 불편한 아내를 간호하느라 그것도 어렵단다. 여러 번의 상담 끝에 미간의 주름이 다소 엷어진 이분이 어느 날 여행 계획을 들고 왔다. 아내와 함께 일주일간 해외여행을 떠날 생각이라고 했다. 자신의 스트레스도 줄고, 소원했던 부부 관계도 좋아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두 가지 조언을 해 드렸다. 첫째, 여행은 처음보다 끝이 더 중요하다는 것. 떠날 때 기억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끝날 때가 엉망이라면 안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둘째, 잠깐이라도 좋으니 꼭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지나온 삶을 돌아보라는 것. 이분께는 특히 아내가 여행 중에 과거에 섭섭했던 일을 끄집어내더라도 화를 누르고 끝까지 참으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2주일 뒤 클리닉을 다시 찾은 이분, 보자마자 손을 덥석 잡는다. “선생님 말씀대로 여행 초반에 분위기가 좋았는데, 막판에 아내가 지나간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확 끓어올랐는데 꾹 참았습니다. 선생님 핑계 대고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자고 했지요. 마음이 한결 편해지더라고요.” 글쎄…, 성공적인 여행을 하신 것 같긴 한데, 이분에겐 이번 여행도 또 하나의 ‘일’이었겠구나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여행을 떠나 보면 도움이 될까요?” 우울증을 비롯한 스트레스 문제로 클리닉을 찾아온 분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다. 아예 인생에 ‘긴 휴가’를 내려는 분들도 있다. 다니던 회사나 하던 사업을 접고 시골에 가서 조용히 살겠다는 것이다. 내 대답은 항상 ‘노(No)’다. 우선 마음이 편해진 다음 여행을 가도 가야 한다. 마음만 편하다면야 복잡한 도심의 사무실에서도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게 우리의 정서 시스템이다. 회사를 그만두는 건 가장 나쁜 선택이다.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멀쩡한 직장 그만둔 것을 후회하게 마련이다.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심리적 이익은 뭘까. 휴식과 자유를 통한 행복감이 아닐까. 하지만 행복 역시 심리적 현상이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거나 불안·걱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아무리 호젓한 곳을 찾아가도 소용없다. 되레 그런 ‘무자극’이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을 더 키울 수 있다. 마음이 편치 않으면 조용한 여행지가 오히려 전쟁터로 느껴진다는 얘기다. 여행의 아이러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충동은 진정한 ‘쉼’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거리가 먼 해외여행지를 선택하는 심리에도 현실에서 보다 멀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긴 비행시간 동안 뇌는 더 지치게 된다. 이국적인 곳일수록 일상과 다른 불편함 때문에 뇌의 스트레스 수위는 더 올라간다. 시차 때문에 수면 문제도 생긴다. 쉬겠다고 떠난 여행이 뇌에 더 많은 피로를 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여행은 어떨까. 비극으로 끝나기 쉽다. 여행의 피로에 불안정한 관계가 주는 심리적 피로까지 겹쳐 주변 경관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긍정적 효과를 내기 어렵다. 좋은 관계로 떠나도 싸우는 일이 많은 게 여행이다. 일단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 낫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 권하고 싶은 여행은 기차·버스를 이용한 국내여행이다. 우선 장시간 운전이나 긴 비행에 따른 피로가 없다.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명상적 효과가 있다. 그럼 혼자 떠나는 것이 좋을까, 함께 가는 게 좋을까. 내게 위로가 되는 친밀한 동반자가 아니라면 차라리 혼자가 낫다. 가족·친구와 함께 가는 여행일 경우에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휴대전화·노트북 같은 물건은 놔두고 떠나자. 자신의 최근 생활을 한번 돌아보라. 뇌에 완벽한 자유를 허락한 24시간이 있었던가? 정보가 없는 무자극의 시간이야말로 최고의 뇌 기능 향진법이 아닐까 싶다.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의 말에서 ‘휴식을 위한 여행’의 힌트를 얻어 보면 어떨까.
윤대현 |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입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쳤습니다.
KBS <명작 스캔들>, <아침마당>,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EBS <60분 부모>등 다수의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습니다. 현재 KBS 라디오 <건강플러스 이충헌입니다><이금희의 사랑하기 좋은날>, MBC 에브리원 <베스트 닥터쇼>, CBS <김미화의 여러분> 에서 고정 패널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 [마음 아프지마], [나는 초콜릿과 이별 중이다](공저)가 있습니다.